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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파묘 무덤보다 깊은 공포 저주보다 강한 운명의 대물림

by 계란언니 2025. 7.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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믿음을 시험하는 재앙의 시작, 영화 ‘곡성’의 서막

2016년 개봉한 나홍진 감독의 《곡성(哭聲)》은 단순한 장르영화의 범주를 초월하여, 종교적 알레고리, 인간의 본성, 악의 정체성에 관한 철학적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는 수작이다. 영화는 전형적인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미스터리한 살인과 광기의 연쇄로 시작된다. 초반부는 블랙코미디적 유머와 농촌 경찰의 어설픈 모습으로 시작되지만, 점차 이야기의 중심이 악의 실체를 둘러싼 혼란과 파국으로 이동하면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몰입감을 선사한다. 《곡성》은 '무엇을 믿고 무엇을 의심할 것인가'라는 인간의 가장 원초적인 갈등을 서사로 삼는다. 일본인 외지인의 등장, 무속인의 의식, 기독교적 상징 등 다양한 종교 코드가 뒤섞인 영화는 마치 신화나 전설처럼 해석의 여지를 무한히 열어둔다. 이 글에서는 영화가 보여주는 구조적 복잡성, 인물의 심리, 그리고 ‘악’에 대한 철학적 탐구를 통해 《곡성》이 단순한 공포영화가 아닌, 믿음과 구원의 본질을 질문하는 작품임을 조명해보고자 한다.

악은 외부에 있는가, 내면에 있는가 – ‘곡성’의 다층적 서사

《곡성》은 한 시골 마을에서 벌어지는 의문의 연쇄살인을 배경으로 하지만, 단순한 스릴러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주인공 종구(곽도원)는 경찰로서 사건을 추적하지만, 진실에 가까워질수록 점점 혼란에 빠지게 된다. 영화의 악은 단 하나의 모습으로 나타나지 않는다. 외지인으로 대표되는 일본인 남성(쿠니무라 준)은 처음에는 수상하지만 단지 이방인의 모습일 뿐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그는 초자연적 존재로 의심받는다. 여기에 무속인 일광(황정민), 흰 옷의 여인 무명(천우희), 기독교적 존재로 해석되는 등장인물들까지, 영화는 다양한 상징과 인물을 통해 관객이 끊임없이 ‘누가 진짜 악인가’를 판단하게 만든다. 중요한 점은 이러한 구조가 명쾌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는 데 있다. 나홍진 감독은 악을 하나의 존재로 특정하지 않고, 믿음의 주체가 누구인가에 따라 악의 형상이 달라진다는 것을 시사한다. 영화는 보는 사람마다 전혀 다른 해석이 가능한 열린 텍스트로 기능하며, 관객의 판단력과 종교적 신념을 적극적으로 개입시킨다. 이처럼 《곡성》은 단순히 외부의 초자연적 악을 그리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가진 불안과 편견이 얼마나 쉽게 악을 생성하고 그에 굴복하는지를 서사 구조로 구현한다.

곽도원과 황정민의 심리적 열연, 인간의 무력함을 드러내다

배우 곽도원은 주인공 종구 역을 통해 ‘보통 사람’이 절망과 공포 앞에서 어떻게 무너지는지를 보여준다. 종구는 영화 내내 무능하고 소심한 경찰로 묘사되지만, 딸 효진에게 위협이 닥치면서부터는 오직 가족을 지키기 위한 절박한 아버지로 변한다. 그의 변화는 단순한 영웅 서사가 아닌, 사랑과 공포 사이에서 갈등하는 인간의 본성을 드러낸다. 황정민이 연기한 무속인 일광 역시 단순한 조연이 아닌, 극의 핵심적인 역할을 맡는다. 일광은 처음엔 신뢰할 수 있는 인물처럼 등장하지만, 점차 사건의 중심에 가까워질수록 그의 정체 또한 불분명해진다. 무속 의식을 통해 악령을 쫓는 장면은 영화에서 가장 강렬한 시퀀스 중 하나로 꼽히며, 리듬감 있는 편집과 사운드, 황정민의 광기 어린 연기가 결합해 초현실적 분위기를 극대화한다. 이 장면은 단지 공포를 자아내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현상 앞에서 얼마나 무기력한지를 시각적으로 표현한 명장면이다. 두 배우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절망을 표현하며, 관객이 ‘과연 누구의 말이 진짜인가’에 대한 혼란을 끝까지 유지하게 만든다.

종교와 상징의 혼용 – 기독교와 무속, 불확실성의 미학

《곡성》의 서사를 관통하는 핵심 키워드는 ‘믿음’이다. 영화는 명확한 세계관 대신 다양한 종교 상징을 통해 믿음의 본질을 질문한다. 예를 들어, 흰옷의 여인 ‘무명’은 천사인지 악령인지 구분되지 않는다. 그녀는 종구에게 경고를 하지만, 그녀의 말이 사실인지 여부는 영화 끝까지 밝혀지지 않는다. 마찬가지로 일본인 남성도 악마인지 단순한 외지인인지 불분명하다. 종교적 상징들이 명확하게 하나의 메시지를 전달하지 않기에, 관객은 끊임없이 자신의 판단을 의심하게 된다. 이는 곧 감독이 의도한 불확실성의 미학이라 할 수 있다. 영화 속 무속신앙과 기독교는 극적으로 충돌하지만, 어느 쪽도 절대적인 진실을 제공하지 않는다. 이는 단순히 종교 간의 대립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어떤 신념 위에 자신의 운명을 맡길 것인가에 대한 철학적 질문으로 이어진다. 믿는다는 행위가 얼마나 위험하고 동시에 얼마나 절실한지를 영화는 시종일관 보여준다. 결말부에서 종구가 믿음을 선택하지만 결국 파멸에 이르는 과정은, 그 믿음이 타인에 의해 조작될 수 있고, 그로 인해 비극이 초래될 수 있음을 암시한다. 이런 점에서 《곡성》은 종교적 영화가 아닌, 종교를 도구로 삼은 인간 심리의 이야기다.

악의 얼굴 없는 침투, 끝나지 않은 질문을 남기다

《곡성》은 단순히 무서운 영화를 찾는 이들에게는 당혹감을, 깊이 있는 영화를 찾는 이들에게는 무한한 해석의 여지를 남기는 작품이다. 이 영화는 명확한 악인도, 확실한 정의도 제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 본능적으로 갖는 불안, 의심, 보호 본능이 어떻게 왜곡되어 파멸로 치닫는지를 집요하게 추적한다. 종구는 딸을 지키기 위해 끝없는 믿음과 의심의 늪에 빠지고, 결국 아무것도 지키지 못한다. 그것이 이 영화의 진정한 공포이자 슬픔이다. 결말에 도달했을 때도 관객은 ‘무엇이 진실인가’에 대한 해답을 얻지 못한 채, 감독이 깔아놓은 수많은 단서와 상징을 되짚으며 혼란에 빠지게 된다. 하지만 바로 그 지점에서 《곡성》은 공포영화의 새로운 문법을 만든다. 단순한 괴물이나 유령이 아닌, 믿음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중심으로 인간의 심리를 뒤흔들고, 무형의 악이 얼마나 쉽게 인간 내부에 스며드는지를 보여준다. 《곡성》은 통속적 결말을 거부하고, 질문만을 남긴 채 막을 내린다. 그 질문은 영화가 끝난 후에도 오랫동안 관객의 마음을 붙잡으며, 영화 속 종구처럼 우리를 끊임없이 시험에 들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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