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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딸 살아있는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 기괴하고도 따뜻한 드라마

by 계란언니 2025. 7. 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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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비딸, 살아있는 가족의 의미를 되묻는 기괴하고도 따뜻한 드라마 <좀비딸>은 대한민국 웹툰계에서 독특한 존재감을 발휘한 작품으로, 좀비 아포칼립스를 배경으로 하면서도 가족 드라마라는 인간 중심의 감성을 녹여낸다. 단순히 좀비로 변해버린 딸을 소재로 한 공포물이 아닌, 감염된 존재를 향한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사랑과 보호 본능을 정서적으로 그려내며, 독자에게 진한 여운을 남긴다. 이 작품은 좀비 장르의 익숙한 공식에서 벗어나, 생명과 관계, 그리고 부모의 희생이라는 보편적 테마를 깊이 있게 다루며 장르적 재미와 감정적 울림을 동시에 전하는 보기 드문 콘텐츠로 평가받는다.

좀비가 된 딸을 사랑할 수 있을까

좀비 장르는 대체로 파괴와 공포, 생존의 긴장감을 전면에 내세운다. 전염병의 확산, 인간성의 붕괴, 총체적인 사회 시스템의 붕괴는 좀비물의 필수 요소로 기능해왔으며, 이는 관객 혹은 독자들에게 생존 본능을 자극하는 서사의 긴장감을 제공해왔다. 그러나 웹툰 <좀비딸>은 이러한 전통적인 좀비물의 틀을 정면으로 뒤집는다. 이 작품은 좀비가 된 존재를 죽여야 할 타깃으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가 좀비가 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수 있을까?’라는 감정적이고 철학적인 질문을 전면에 내세운다. <좀비딸>의 주인공은 한 평범한 중년의 아버지다. 그에게는 하나뿐인 딸이 있다. 하지만 어느 날, 좀비 바이러스가 세상에 퍼지고 그의 딸도 감염된다. 문제는 그 딸이 완전히 좀비가 되어버린 것도, 그렇다고 인간성을 온전히 유지하고 있는 것도 아닌 중간 단계라는 점이다. 이 상황에서 주인공은 딸을 죽이는 대신, 지하 벙커에 숨기고 정성을 다해 보살핀다. 그는 매일 음식을 주고, 대화를 시도하고, 딸이 다시 인간으로 돌아올 수 있다는 희망을 품는다. 이 설정은 장르적으로 보면 비현실적일 수 있지만, 감정적으로는 매우 현실적인 공감을 자아낸다. 부모라면 누구나 자식을 끝까지 지키고 싶은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좀비가 되었더라도, ‘그 아이’가 내 딸이라면 끝까지 함께하고자 하는 본능은 이성보다 앞설 것이다. <좀비딸>은 바로 이 지점에서 강한 울림을 준다. 뿐만 아니라, 이 작품은 단순히 한 가정의 이야기로 그치지 않는다. 좀비 바이러스가 창궐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은 여전히 살아가고, 사회는 여전히 돌아간다. 그러나 감염자에 대한 시선, 혐오, 차별은 그 어느 때보다 노골적이다. 이는 실질적으로 우리 사회가 타인, 특히 장애나 병, 사회적 취약성을 가진 존재들을 어떻게 대하는지를 은유적으로 드러낸다. <좀비딸>은 다소 괴상해 보이는 설정을 통해 오히려 가장 보편적이고 인간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보호받아야 할 존재에 대한 책임감, 사랑이라는 감정의 지속 가능성, 그리고 희망이라는 감정이 인간을 얼마나 오래 버티게 하는지를 이 웹툰은 조용하지만 단단하게 이야기하고 있다.

좀비와 인간 사이, 경계 위에 선 가족 이야기

<좀비딸>의 가장 인상적인 지점은 ‘좀비’라는 개념을 공포의 대상이 아닌, ‘아직 완전히 사라지지 않은 존재’로 재해석한 데 있다. 주인공의 딸은 감염자이자 희생자이며, 동시에 여전히 아버지에게는 소중한 자식이다. 이 모호한 경계는 작품 전체에 긴장감을 부여하며, 기존의 좀비물에서 좀처럼 다뤄지지 않았던 감정적 이중성을 형성한다. 작품 초반부, 아버지는 딸을 숨기며 필사적으로 생존을 도모한다. 그가 선택한 방식은 사회적 격리, 은폐, 은신이다. 이는 단순한 도피가 아닌, 세상으로부터의 보호이자 자신의 마지막 희망을 지키려는 안간힘이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며 그는 점차 현실과 마주하게 된다. 식량 문제, 딸의 본능적인 폭력성, 외부인의 침입 등 현실적인 문제가 그들의 일상을 위협한다. 이 과정에서 아버지는 점점 정신적, 육체적으로 지쳐간다. 특히 인상 깊은 에피소드는, 딸이 어느 순간 아버지를 알아보는 듯한 반응을 보이는 장면이다. 순간의 눈빛, 익숙한 행동, 반응 없는 듯 보이지만 살짝 움찔하는 손동작 하나가 아버지에게는 희망의 근거가 된다. 이 희망은 독자들에게도 큰 감정적 파동을 불러일으키며, ‘혹시 정말 다시 돌아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가능성에 기대게 만든다. 작가는 이러한 연출을 통해 인간 감정의 복잡성과 부모의 사랑이 지닌 끈질김을 강하게 각인시킨다. 작품 속 사회는 감염자를 ‘처리 대상’으로 간주하며, 그 가족에게조차 책임을 묻는다. 이는 감염자와 그 가족을 향한 사회적 시선과 차별을 고스란히 반영한 설정이다. 딸을 숨기고 있다는 이유로 아버지는 범법자로 간주되고, 그를 추적하는 이들은 ‘공공의 적을 숨긴 자’로서 그를 몰아세운다. 이런 설정은 단순한 좀비 서사를 넘어, 우리가 소수자와 질병, 장애를 대하는 사회의 일면을 상징적으로 조명한다. 작품은 또한 아버지라는 존재를 통해 ‘보호자’의 의미를 되묻는다. 아버지는 자신이 세상과 완전히 단절되더라도 딸을 지키겠다는 신념을 포기하지 않는다. 이는 부모라는 존재가 가진 무조건성과 절대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장면들이며, 독자들에게 깊은 감동과 질문을 동시에 던진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주는 진정한 공포는 좀비가 아니라 ‘사랑이 점점 무너지는 순간’이다. 딸이 점차 인간성을 잃어가는 과정을 바라보는 아버지의 슬픔,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을 포기하지 않으려는 절절함, 그리고 언젠가는 작별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두려움은 그 어떤 좀비보다 현실적이고 무섭다. 이는 독자가 단지 공포를 넘어서 작품에 정서적으로 몰입하게 만드는 강력한 요소로 작용한다.

괴물로 변한 세상 속, 인간임을 지키는 선택

<좀비딸>은 결국 좀비라는 장르적 외피를 두르고 있지만, 그 속은 철저히 ‘가족 드라마’다. 그리고 그 가족은 보편적인 의미의 행복한 가정이 아니라, 극한 상황 속에서 ‘사랑’이 무엇인지를 증명해야 하는 극단적인 환경에 놓여 있다. 아버지는 선택한다. 딸을 죽이는 대신, 함께 살아가는 길을. 그 선택은 그 자체로 고통스럽고, 외롭고, 절망에 가까운 길이다. 그러나 그는 그 길을 선택함으로써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품격을 지킨다. 작품 말미로 갈수록, 딸은 점점 더 ‘인간성’을 잃어간다. 본능이 강해지고, 언어를 잊고, 공격성이 두드러진다. 하지만 아버지는 끝까지 그를 놓지 않는다. 세상이 딸을 포기해도, 그는 포기하지 않는다. 이 지점에서 <좀비딸>은 극적인 감정의 정점에 도달한다. 사랑은 과연 어디까지 유효한가? 인간이라는 존재의 경계는 어디까지 허용 가능한가? 그 질문은 단지 작품 속 인물들에게만 향하지 않는다. 독자 스스로에게도 그 질문은 돌아온다. 무엇보다 이 작품이 인상적인 점은, 감정의 과잉에 기대지 않는다는 점이다. 과장된 대사 없이, 극단적인 상황 설정 없이, 조용하고 끈질기게 이어지는 서사 안에서 오히려 더 큰 감동이 피어난다. 이는 작가가 인간의 감정을 얼마나 정교하게 직조하고 있는지를 증명하는 요소이며, 장르물을 새로운 시각에서 바라보게 만든다. 현실에서도 우리는 가끔 누군가를 ‘포기해야 하는 순간’에 직면한다. 치매에 걸린 부모, 의식이 없는 가족, 자폐를 가진 자녀, 사회적 규범에서 벗어난 친구 등등. 그들과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끝없는 인내와 고통을 동반한다. 하지만 <좀비딸>은 말한다. "그래도 함께 살아가야 한다. 왜냐하면 그들은 여전히 우리 가족이니까." 이처럼 <좀비딸>은 단순한 웹툰 콘텐츠를 넘어서, 인간과 사랑, 보호와 용서에 대한 강력한 철학적 질문을 담아낸다. 그 안에는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따뜻함과, 누구도 쉽게 결론내릴 수 없는 비극이 공존한다. 그렇기에 이 작품은 수많은 좀비물 속에서도 독보적인 울림을 남긴다. 그것은 좀비가 된 ‘딸’ 때문이 아니라, 그녀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아버지’가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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